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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배우_ 오드리 헵번

‘세기의 연인’, ‘헵번 스타일’,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공주님’

 

오드리 헵번은 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미모를 가진 배우였다.

섹시한 여배우들 중심이었던 헐리우드에 우아하면서도 장난끼 가득한 소녀 같은 순진함이 공존하는 그녀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그녀의 유년기

 

오드리 헵번은 영국 은행가였던 아버지와 네델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드리 헵번이 6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나치에 빠져 집을 떠났고, 곧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드리 헵번과 가족들은 풀을 뜯어 먹고,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170cm의 키였지만, 체중은 40kg가 채 되지 않았다. 남들은 그런 그녀의 날씬한 몸매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본인과 가족들에게는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굶주림의 슬픈 흔적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발레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전쟁 중에도 발레 연습을 멈추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프리마돈나가 되기에 그녀의 키는 너무 컸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 돈을 벌기 위해 올랐던 연극 무대를 본 감독이 그녀를 유럽 가상 국가의 공주역으로 캐스팅했다. 그렇게 출연하게 된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인생 영화가 되었고, 그녀를 전설로 만들어주었다. 유럽의 우아함을 기대했던 헐리웃에, 그녀는 딱 들어 맞았고, 그해 아카데미 여후주연상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녀의 영화들

 

다음 영화인 <사브리나>에서 오드리 헵번은 부잣집 아들을 짝사랑하는 운전기사의 딸을 연기했다. 깡마른 촌뜨기가 파리 유학을 다녀온 뒤 세련된 여자로 변신해서 사랑을 이루는 역할이었다. 배역을 받은 오드리 헵번은 의상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는 아직 로마의 휴일이 개봉하기 전이라 디자이너들은 오드리 헵번을 알지 못했고, 그때 유일하게 그녀를 만나준 것은 지방시 뿐이었다. 지방시 역시, 헵번이라는 성만 듣고 다른 배우로 착각한 것이었지만, 직접 오드리 헵번을 만난 후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 후 사브리나는 디자이너의 의상을 협찬 받은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었고, 지방시는 그 이후에도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에 의상을 협찬했다. 지방시는 그녀를 위한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을 만들어냈고, 성공도 함께 누렸다. 그런 둘의 우정은 오드리 헵번이 눈을 감을 때까지 40년간 계속되었다.

 

 

오드리 헵번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주었으며, 그녀를 최고의 배우로 만들어준 영화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었다.

오드리 헵번이 편한 차림으로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문리버'를 부르는 장면이나 택시에서 내려 '티파니' 매장 쇼윈도 앞에서 커피와 도넛을 먹던 장면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만한 전설적인 장면이다.

 

그 후로도 그녀의 연기는 계속되었다.

발레리나였던 실력을 마음껏 선보였던 <화니 페이스>, 수녀 역으로 나왔던 <파계>, 인디안족으로 등장했던 <용서 받지 못한 자>, 꽃 파는 처녀에서 우아한 레이디로 변신했던 <마이 페어 레이디>까지 약 2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의 남편들

 

그런 오드리 헵번은 유난히 남자 보는 눈이 없던 것 같다. 오드리 헵번은 2번의 결혼을 했고, 2명의 아들을 낳았고, 좋은 엄마였지만, 그녀의 남편들은 최악이라고 할만했다.

오드리 헵번의 첫 번째 남편은 이미 3번의 이혼 전력까지 있던 바람기 많은 동료 배우였다. 주변에서 모두 둘의 결혼을 말렸지만, 오드리 헵번은 그와 교제를 시작한지 1년만에 결혼을 감행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다. 전쟁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전쟁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남편을 위해 전쟁 영화에도 출연했고, 히치콕 등 유명 감독의 작품을 거절하고 남편이 만드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오드리 헵번을 무시하며 수많은 외도를 계속하다 이혼 직전에는 폭력까지 썼다. 결국 3번의 유산을 경험한 오드리 헵번은 이혼을 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의 실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드리 헵번은 이혼 1년 후 자신의 팬이라고 하는 9살 연하의 의사와 재혼했다. 그러나 재혼한 남편 역시 수많은 외도로 그녀를 힘들게 했다. 파파라치에 다른 여자와 찍힌 사진이 200명이 넘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오드리 헵번은 두 번째 결혼에서도 아들을 한 명 낳았고, 그 후 10년 동안 두 아들의 엄마로, 가정주부로 충실하게 살아갔다. 남편이 수많은 외도를 했음에도 오드리 헵번이 이혼하지 않았던 건 아들들이 자신의 이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12년 후 다시 이혼한 그녀는 그 후로는 다시 재혼하지는 않았다.

 

봉사활동...그리고...

 

 

그 후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어려웠던 어린 시절, 자신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결심했다. 그 후 오드리 헵번은 수많은 빈민국으로 봉사를 다녔다. 사람들은 불편한 잠자리에서 하찮은 것들을 먹어야 하는 그녀를 걱정했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봉사는 길지 못했다. 봉사 활동을 시작한지 5년 후 갑자기 복통을 느낀 오드리 헵번은 결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남은 시간은 단 3개월, 치료 방법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치료를 포기하고 스위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이 너무나 약해져 있어 오랜 비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나선 것이 그녀와 오랜 우정을 나누었던 지방시였다. 그는 자신의 전용기에 최고의 의료진과 최첨단 의료기기를 설치한 후 오드리 헵번과 함께 스위스로 날아갔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스위스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6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오드리 헵번은 따로 유언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자식들에게 해 준 이야기가 유언처럼 전해지며 그녀의 심성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운 외모와 멋진 연기로 우리 기억 속에 살고 있지만,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런 따뜻한 마음일 것이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눠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 아이의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며 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