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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배우 -그레이스 켈리

세계의 연인, 세기의 결혼,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

헐리우드의 여신으로 날라 올라 모나코의 왕비로 꽃피웠고, 이슬처럼 사라진 그녀에 대한 이야기다.

 

 

그레이스 켈리는 부유하고도 엄격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의외로 다른 형제들에 비해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성격도 소심한 편이었던 편이라 그녀가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어이 없어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는 조정선수로 금메달까지 딴 성공한 사업가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모델 출신의 수영 선수로 대학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십대 시절부터 여러 가지 사고를 치고 다니던 그레이스 켈리는 집안의 문제아였다. 성적이 좋지 않아 퇴학을 당할 정도였고, 유난히 나이 차이가 많은 남자나 유부남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녀의 첫 경험 역시 17세 때, 친구의 남편이었다고 하니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녀가 결혼하겠다고 데리고 온 남자는 50명이 넘을 정도였지만 집안의 반대로 실제 결혼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시작된 연기자 생활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14시간이라는 영화로 데뷔한 후 얼음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영화 <하이눈> <모감보>,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 <나는 결백하다>, <갈채> 등에 출연하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모나코의 레니에 공과 화보 촬영장에서 우연한 만남을 가진 뒤 그의 계속된 청혼에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사랑에 빠져 헐리웃 배우가 유럽 왕실의 왕비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런 그녀의 그녀의 결혼은 전세계로 생중계되면서 3천만명이 시청했다고 할 만큼 흥행에 성공했고, 지금봐도 아름다운 당시의 드레스는 7억 상당, 프로포즈에 사용됐던 다이아는 450억원 상당의 10캐럿 다이아몬드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 덕분에 모나코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관광지가 되었고, 세계 2차 대전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하던 모나코를 회생시켜주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다쳤을 때 팔을 감쌌던 스카프는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임신했을 당시 배를 가렸던 백은 지금도 켈리백이라고 불리며 여자들의 워너비백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헐리우드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그녀가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럽 왕실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왕실에서 그녀를 무시했다는 정황도 많이 드러났다. 심한 시집살이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 그녀에게 히치콕 감독이 찾아와 새로운 영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모나코는 프랑스와 심각한 외교 문제를 갖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왕비로의 삶을 선택했다.

 

그러던 중 1982년 그레이스 켈리, 52살. 그녀가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된다.

아름다웠던 동화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왕실 작가가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며 나섰다.

그레이스 켈리는 정략 결혼의 희생자라는 주장이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왕비가 된 것이 운명적 사랑이 아니라 선박왕 오나시스에 의해 만들어진 한편의 영화라는 것이었다.

 

당시 2조원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던 오나시스는 모나코에서도 투자를 받았었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이 터지면서 모나코의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모나코의 주수입원은 관광이었는데,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었다.

이대로면 오나시스의 사업 역시 문제가 될 상황이었고, 이때 오나시스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헐리웃 배우를 왕비로 들여 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자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성공했다. 당신 그레이스켈리의 결혼식은 세계적으로 흥행했고, 모나코는 다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나라가 되었다.

그 후 그레이스 켈리는 3명의 자녀를 낳고,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가 가족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그레이스 켈리는 딸의 고등학교 입학식을 위해 직접 운전해서 궁으로 가던 중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도로를 달리던 중 갑자기 차가 방향을 잃고 흔들리다가 37미터 아래로 추락했으나, 딸은 가벼운 타박상만 당하고, 그레이스켈리는 하루 뒤 사망했다.

 

 

그러니 이와 관련해 수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한 나라 왕비의 사고에 구조팀이 출동한 시간이 오래 걸렸고, 사건 현장은 신속하게 치워졌고, 같은 차에 타고 있던 모녀의 부상 정도가 너무 달랐고, 병원에 이송된 뒤에도 제대로 된 치료시설이 없었다.

더욱이 당시 운전 기사 없이 운전대를 직접 잡았었다는 것도 의문점으로 지적된다.

거기다 그레이스 켈리의 남편이, 그녀가 병원에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은지 36시간만에 생명유지 장치의 제거를 요청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 뒤에 모나코 왕실이 있었다는 소문이 돈 것이었다.

아직까지 그 진실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리고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동화의 엔딩을 기대하던 사람들에게 슬픈 결말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