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약속이 있어 시내 한복판의 커피숍에 갔더니 옆에 있는 아가씨 둘이 서로 눈짓을 하며 “야! 여기만 해도 시골이다.”하는 것이다. 순간 ‘어? 뭐야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의 말대로 이젠 우리 나이에 갈 곳이 많지 않다. 천지가 다 젊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간혹 가는 흔하디흔한 커피숍에도 손님 중 우리 일행이 가장 나이가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친구 중 하나가 “야 이젠 우리가 이런데 오는 것도 민폐인 거 같다. 주변 눈치 보여서 다방을 찾아야 할 것 같아.” “내가 아예 7080이 가는 곳을 차릴까?” 하는 지인도 있었다. 내가 20대에 60대의 모습은 상상도 안 했으니 젊은 사람들이 보는 우리 모습도 이해는 간다.
할머니께서 첫사랑 얘기를 하시면 할머니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나 싶었다. 허리 32인 옆집 아줌마가 과거 허리가 23이었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아줌마들에게는 처녀시절이 없었을 거 같았다. 어느새 나이가 60이 넘고 보니 그때의 20대가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누가 나이 얘기를 하면 “저도 한 살부터 시작했거든요?”하고 웃는데 왜 이렇게 세월이 빠른지 모르겠다. 아가씨들은 절대로 아줌마가 안 될 줄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왜? 아줌마들은 옷을 저렇게밖에 못 입지? 집에서 화장도 하고 예쁘게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결혼하고 아줌마가 되고 보니 예쁘게 입고는 집안일을 하기가 영 불편해서 편한 것을 찾게 되고 집에 있으면서 화장하는 게 영 불편하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집에서 종일 노는 줄만 알고 “대체 집에서 청소도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옆집은 늘 깨끗하던데.”하고 속을 긁기 일쑤다. 그렇게 남편들이 보는 것처럼 옆집은 뭐든 나보다 잘하는 것 같아도 201호나 우리 집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원로대학에 가서 가끔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아들이 주방에 들어가 며느리를 돕고 있으면 화가 나는데 딸집 가서 사위가 주방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다고 하신다. 또는 며느리가 친정부모에게 주는 용돈은 아들 몰래 빼돌린 것이고 딸이 친정 부모에게 용돈 주는 것은 키워준 것에 대한 보답이고 효도이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것은 다 내 잣대이고 편견이다.
나는 요즘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속으로 ‘아님 말구, 그러든가 말든가’하고 중얼거린다. 부탁했는데 거절당하거나 다른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경우를 예로 든다면 ”돈 좀 꿔줄래? 아님 말구“, ”쟤가 내 얘기를 하고 다니는구나. 나에 대한 오해겠지“ 하고 만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세월이 스승’이다. 이 나이가 되니 화가 나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이해심도 생기고 세상사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아들은 이런 내가 오히려 걱정되는지 엄마 괜찮냐고 수시로 묻는다. 그러면서 말이라도 엄마의 노후대책은 바로 저라며 아무 걱정을 말라고 한다. 그런 소리 말고 너나 맘에 드는 여자 만나서 결혼하라고 하면 대답을 안하고 웃어버린다. 우스갯소리로 요즘 젊은이들이 시집 장가를 안 가니 한번 가본 우리가 한 번 더 하자고 말하긴 하지만, 진심으로 빨리들 자기 짝 만나서 결혼했으면 좋겠다.
보는 이마다 내게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말해주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건망증이 너무나 심해졌다. 택시 기사가 해준 얘기다. 할머니가 택시에 타서 메리야스에 가 달라고 했는데 기사가 메리어트 호텔로 모셨다. 기사양반이 그걸 어찌 알고 내려주었냐고 감탄스러운 듯 말하니 “할머닌 덜해요. 어제는 전설의 고향 가자는 것을 예술의 전당에 내려드렸는데요.”라고 대답했단다. 한참 웃었지만 남의 얘기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커피숍에 앉아 있는데 어느 중년의 여성이 다급하게 들어오며, 화장실 비밀번호를 묻는다는 것을 ‘화장실 계좌번호가 몇 번이에요? 해서 우리 모두 웃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치매인지 건망증인지 알아보자. 첫째 버스 앞에 서 있는데 버스에서 방금 내린 건지 탈 건지 헷갈리면 치매다. 둘째, 화장실에서 바지는 벗었는데 볼일을 볼 건지 본 건지 헷갈리면 치매다. 셋째,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오르다 넘어졌는지 내려가다 넘어졌는지 헷갈리면 치매다. 살면서 절대로 걸려서는 안 되는 것이 치매가 아닌가 싶다.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안 하는 사람보다 치매에 덜 걸린다고 한다. 우리 나이에 무리가 가지 않는 운동으로 파크골프를 추천하는 분들이 많다.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도 못하고 살았는데 주변에서 하도 파크골프가 좋다고 하니 바쁜 일정이 마무리되면 친구들과 파크골프를 치러 가볼까 한다. 나와 친구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박인옥
(사)한국교육협회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