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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인사이드

<우주 최강 동안 이길여 총장>

 

92세 현역 가천의대 총장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

인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

이 말은 모두 이길여 총장을 상징하는 말이다.


 

1932년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해이며, 올해로 92세가 된 이길여 총장이 태어난 해이다. 이총장은 한국 격동의 시대를 모두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산 증인이다.

 

국어 시간에는 일본어를 공부했고 학교에서 우리말을 썼다고 교사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독립했고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전쟁이 나서 방공호에서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해야 했고, 부산에 생긴 피난 의대를 다녀야 했다.

그렇게 힘든 시기였지만 하루에 네시간씩 자면서 노력했고, 드디어 의사가 되어 본인의 이름을 딴 산부인과를 개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선진 의료 기술이 부족했다. 환자들을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서 더 배워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환자들이 울면서 자기 말라고 붙잡았다. 마음이 약해졌지만, 결국은 자신이 더 배우는 것이 환자들을 위하는 길이라는 판단으로 미국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함께 공부했던 미국의 동료들과 지도 교수들은 낙후되고 아직 전쟁의 위험도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이총장을 잡았지만, 그녀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총장에게 한국은 반드시 돌아와야 하는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한국의 현실은 비참했다.

풍요로운 미국에 비해 한국에서는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넘쳐났다. 당장 수술해야 할 정도로 피를 흘리는 환자가 돈이 없다며 퇴원하려는 모습에, 돈은 나중에 줘도 된다며 무료로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일도 많아졌다.

그러다 1978년 여의사로써는 한국 최초의 의료법인을 설립했고, 1991년에는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를 지원하기 위한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까지 발족하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이총장은 베풀 줄 아는 여유로운 마음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고,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아직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제도가 없던 시절,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보증금을 받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이총장은 이를 과감히 없애기도 했다.

 

 

그런 총장의 마음이 드러나는 유명한 일화는 네쌍둥이 자매와의 인연이었다.

1989년, 위급한 상태로 병원을 찾은 임산부는 그 당시로써는 보기 힘든 네쌍둥이를 품은 산모였다. 출산 예정일보다 먼저 양수가 터진 산모에 당황한 병원들은 큰 병원으로 가라며 산모를 거부했다. 그렇게 길병원까지 오게 된 산모, 그렇다보니 이총장은 어떤 챠트도 없는 상태에서 산모의 수술을 하게 되었다. 결국 제왕절개로 무사히 출산은 했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네 쌍둥이의 부모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그 당시는 지금처럼 아이를 출산한다고 나라에서 지원이 대단한 지원을 해 줄 때도 아니었다.

특히 인큐베이터 같은 고가의 장비 사용료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할 때였다.

그러나 이 사정을 알게 된 이총장은 병원비는 물론, 아이들이 잘 자라면 대학 등록금까지 지원하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서 간호사가 된다면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도 해 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어렵게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덕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그 약속을 잊을 때쯤, 이총장은 문득 사진첩에서 그 네쌍동이와 찍은 사진을 발견한 뒤 수소문했고, 가족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는 약속한 것처럼 학비를 지원했다.

신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던 총장의 면모가 보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총장의 마음에 보답을 한 것인지, 네쌍둥이 자매들은 모두 간호사가 되었고, 길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에 3명의 쌍둥이는 합동 결혼식까지 열렸고, 이곳에도 이총장이 함께했다.

 

 

 

이런 이총장은 92세가 된 지금도 여전히 반듯한 자세로 하이힐을 신고 다니고, 또렷한 발음과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며 당당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50대로 보이는 동안의 얼굴은 물론이고 그 흔한 임플란트 하나 없다고 하니, 사람들은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한다.

 

이 질문에 길총장은 자신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술과 담배는 하지 않고, 지금도 매일 산책을 빼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날씨가 좋지 않다면 실내서라도 매일 걷는 것을 빼먹지 않을 정도로 운동은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건강한 식단 역시 강조한다. 달거나, 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소식을 하며 물을 충분히 마시는 것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충분히 마시면 몸의 신진 대사가 활발히 일어나서 좋은 몸매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고, 몸에 활력도 준다. 특히 충분한 수분 섭취는 근육의 경력을 막고, 관절을 부드럽게 해 주고 피부에 영양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담처럼 덧붙이는 말은 독신이라는 것이다.

이총장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결혼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슬하에 자녀도 없다. 결혼 생각이 없으니 그 흔다하는 맞선 한번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가족에게 쏟을 정성을 본인과 환자들에게 쏟을 수 있었다고 한다.

대신 환자와 학생들을 자신의 가족이라고 여기며 그들에게 활력과 열정을 얻었고,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지내 왔다고 한다.

 

 

이처럼 이길여 총장은 올해로 92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 지난해는 학생들 앞에서 강남 스타일 춤을 선보여 환호를 받았고, 올해 가천길 재단의 신년하례식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인공지능(AI)에 대한 준비를 적극적으로 하라고 당부했다.

이길여 총장은 누구보다 빠르게 변했던 시기를 몸으로 겪으며 앞으로 올 시대의 변화 역시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아니, 누구보다 먼저 그 미래를 준비하고 노력하고 있다.

 

이총장은 멈추면 죽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일할 것이다라는 철학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여전히 가천길재단의 회장이자, 가천대학교 총장, 그리고 가천대 길병원의 명예 이사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